아카아시ver.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

최종화

* "아유~ 피디님 또 그러시네. 그런 컨셉트로 나가면 처음에는 인기 많을지 몰라도 컨텐츠에 밀려서 시청률 떨어져요. 제가 이런 쇼프로그램 대본을 얼마나 많이 읽어봤는데요. 딱 보면 답 나오죠." 막 담당PD에게 온 전화를 받으며 그녀가 자신의 노트북의 파일을 연다. 탁탁,하며 엔터를 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도 들렸는지 피디가 대본 체크중이냐고 묻는다....

* 반팔의 흰 셔츠에 남색 넥타이를 한 중년의 남자가 흰색 타일의 복도를 걸었다. 평소의 얼굴은 중년이라기에는 조금 젊어보였지만 웃는 얼굴에 눈가에 잡히는 주름을 보면 누구나가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. 그가 똑똑,하고 병실 문에 노크를 했다.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. 그는 대답을 할 리 없었고, 이 늦은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건... 문을 ...

* 서로 이야기해야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건 이 밤이 지나고 나서라도 괜찮았다. 우리는 서로에게 목말랐다. 우리는 서로의 손길과 입술로, 입으로 하는 것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. 우리가 누워있는 곳까지 흘러들어온 빗물이 니 등과 내 다리를 적셨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일어났고, 그제서야 너와 나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. "머리...일부러 핀거야." "머...

* 받아들이기 힘들었다. 오늘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파워에이드가 손바닥에 만들어내는 차가운 물방울과 그보다 더 차가운 너의 통보에. 며칠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. 전화를 해도 넌 받지 않았고 톡을 보내려고 해도 너는 그 앱조차 지워버린 것 같았다. 참 잔인했다. 이렇게 나에게는 아무런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너는 너 혼자서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...

* 응원과 환성이 가득한 경기장 안. 달아오르는 열기 속 모든 이들이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, 그녀의 눈은 오직 그를 향하고 있었다.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. 경기에 집중해보려고 해도 어느 순간 그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자신이 있었다. 이 이유였을까. 시합을 보러 오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보러 온 것. 중국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었음에도 불...

*65 * "모모야... 괜찮아...?" 방금 제트코스터에서 내려 빠르게 뛰어가 벽을 잡는 모모 뒤로 유양이 다가오며 물었다. 괜찮다고 생각했는데, 이런 놀이기구 같은 거 원래 잘 탔었는데 지금 탄 건 생각보다 많이 울렁거렸다. "...네. 조금...쉬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." 모모가 조금은 가쁜 숨을 쉬며 말했다. 그리고 유양을 돌아보았다. 그의 앞머리가...

*64 중국어의 기본 문장은 목적어가 동사 뒤에 오지만, 把자문과 被자문은 목적어를 동사 앞쪽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... ...까지 읽던 모모가 양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. 어렵다. 어려웠다. 역시 3급이 기초였다면 고급 과정에 들어가기 전 단계인 4급은 역시 쉽지가 않다. 이제 공부를 시작한지 두 달이 된 모모에게는. 하-하고 한숨을 쉬고 천장을...

*63 빠아아앙- 귀를 찢을 듯한 기차 소리에 모모가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귀를 막았다. 카페 안의 사람들 중 이렇게 귀를 막는 사람은 모모뿐이었다. "아직도 적응 안 돼?" 모모 앞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원경이 귀를 막는 모모를 보고 물었다. 원경이는 모모의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적이 있었다. 이번에 중국에 간다는 것을 원경에게 알리자 원경이는...

*62 * 막이 내리자 모든 공연이 그렇듯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. 공연장 안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후끈한 열기가 뜨거웠다. 감독인 자신이 봐도 만족스러운 편에 속하는 무대였다. 이렇게 앞으로 일곱번의 공연이 이어지겠지. 자신은 앞으로 남은 그 일곱번도 와서 봐야 했다. 누가 들으면 똑같은 걸 몇 번이나 보면 지루하지 않냐고 하는데 그것은 잘 몰라서 ...

*61 "'와,아들..." 막 나가려는 아들과 마주친 사쿠라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았다. 평소에는 교복만 입는 아들의 옷차림이 자신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. 흰색 목티에 회색 체크무늬 코트와 청바지. 말로만 하면 참 간단한 설명이지만 이 조합이 어울리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. 그리고 그 힘든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아들... "아들 오늘 너무 멋있다....

*60 * "...하고 싶은 거구나." 그렇게 며칠간 고민하고 고민하다 오늘, 엄마에게 말했을 때,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이것이었다. 왜 이제서야 엄마한테 말했니. 니가 먼저 선택하고 엄마한테 이야기하다니 그건 통보잖아, 같은 말을 하면 어쩌지, 하는 생각을 조금 했었다. 조금만 했던 것은 그녀가 엄마가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...

*59 * "...음..." 벌써 몇 번이고 울려대는 벨소리에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가 실눈을 떴다. 깜깜한 어둠이 눈에 익숙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한밤중이다. 하지만 이렇게나 계속 전화를 해대는 걸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까. 그 순간 그는 잠이 들기 전 한 전화에도 받지 않은 그녀가 떠올랐다. 그가 바로 머리맡에 놓여있는 수화기를...